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단 편집) == 사형 집행 == 사형 집행은 [[미합중국 육군|미 육군]] [[교수형]][* 군인이면 총살형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미군은 교수형도 집행했다.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미군 사형수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을 정도로 총살형보다 더 흔했다.] 담당관이었던 [[미군 군사경찰]] [[상사(계급)|상사]] 존 C. 우즈(John C. Woods, 1911–1950)[* 이 분야에서 권위자였으나 엔지니어 조명 세트를 수리하던 중 실수로 감전사를 당해 39세로 사망했다고 한다.]가 군사경찰 [[병사]] 조지프 몰타(Joseph Malta, 1918–1999)의 보조를 받으며 행했고 증인들로 [[미군]]과 [[소련군]], [[영국군]], [[프랑스군]] 관계자들과 [[군종장교]], [[군의관]], 취재 허락을 받은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의 기자 하워드 K. 스미스(Howard K. Smith. 1914–2002) 등이 입회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사형(교수형)은 1시 11분부터 2시 57분까지 약 1시간 40분 동안 집행되었고 원래는 헤르만 괴링이 먼저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가 군인들에 대한 [[총살형]] 집행을 반대하여 교수형으로 선고되자 이에 반발해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는 바람에[* 소련은 이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자국 요구대로 불명예 교수형으로 고통스럽게 죽지 않고 편하게 자살해서라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시작으로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한스 프랑크, 빌헬름 프리크,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프리츠 자우켈,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순으로 집행되었다.[*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는 리벤트로프-카이텔- 칼텐브루너-로젠베르크-자우켈-프랑크-요들-슈트라이허 순으로 집행되었다.] 참고로 교수형 집행 과정에서 소련 측이 사형수 모두에게 추가적인 고통을 주는 교수형으로 집행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이는 사형 선고 문단에서 설명한 대로 독일로 인해 나라가 5년 동안이나 박살나고 소련인이 2900만명이 사망하고 1000만이 넘는 인원이 부상당했기 때문에 소련 측에서는 독일이라면 이를 갈고 치를 떨었기 때문이다. 독일을 멸망시키고 찢어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상황. 이러한 이유로 편하게 보내 줄 수 없기 때문에 교수형 집행시 추가적인 고통을 주면서 집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우즈 상사 등 집행자 측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줄 길이를 조절해서 군인을 포함한 사형수들을 모두 고통스럽게 질식사하였다. 소련의 요구대로 집행 후 추가적인 고통을 받으며 사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음과 같다. *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18분 *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총사령관 - 24분[*A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기각 처리.][*K 낙하시에 교수대 발판이 작게 만들어졌고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으며 이로 인해 온 얼굴에 피를 쏟아내면서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질식사했다.] * 경찰청장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13분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10분 *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 - 10분 5초 * 체코 총독 빌헬름 프리크 - 12분[*K] * 출판업자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14분 * 노동 고용 총감 프리츠 자우켈 - 14분 * 육군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 국방군 작전부장 - 16분[*A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기각 처리.]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기록 없음 서양에서는 사형수를 미결수 취급하므로 전원은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대부분은 [[양복]]을 구해 입고 교수대에 올랐다고 한다. 카이텔과 요들도 군인 신분이 유지되었던 관계로 교수형 집행이라도 육군 군복 착용을 허용받아 일본의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일본군]] 전범들과는 다르게 군복을 입은 채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다만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이 두 장군은 군복에 계급장을 포함한 그 어떤 부착물도 달지 못했다. 사형수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을 할 기회를 줬는데 "없다(No)."고 대답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제외한 나머지가 유언을 남겼다. [[한스 프랑크]]처럼 용서를 빌면서 반성한 이들도 있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단지 회한만을 남긴 이들[* 리벤트로프는 "독일이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는 것과 세계의 평화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으며 카이텔 원수는 자신은 독일인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며 독일을 위해 먼저 죽은 부하들을 따라간다고만 하였다고 한다.]이 대다수였다. 슈트라이허처럼 죽는 순간까지 반성하지 않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유대인 학살을 합리화하고 연합군을 저주하던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자우켈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은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상관이었던 슈페어는 20년 형을 선고받은 것에 비해 자신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니 유무죄는 몰라도 양형에 대해선 억울하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